박용만 “나는 사진작가다”…50년간 바라본 ‘인간의 순간’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사람은 언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말할 때가 아니라, 등을 보일 때다.

박용만 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같이 걷는 길 이사장)이 사진가로서 첫 개인전 ‘HUMAN MOMENT’를 열었다. 전시는 1월 16일부터 2월 15일까지 서울 중구 전시공간 피크닉(piknic)에서 열린다. 50여 년간 그가 기록해온 사진 가운데,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남아 있던 장면 약 80점이 처음 공개된다.

이번 전시는 ‘전직 기업인의 취미 공개전’이 아니다.

15일 전시를 앞두고 만난 그는 스스로 분명히 선을 그었다.
“나는 이제 기업인이 아니라 사진작가다.”

◆ ‘HUMAN MOMENT’, 인간의 순간을 기록하다
전시 제목 ‘HUMAN MOMENT’는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지시하지 않는다.
사람이 직접 등장하든, 이미 떠난 흔적만 남아 있든 그의 사진은 늘 ‘사람의 존재감’을 중심에 둔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순간’은 극적인 장면이 아니다. 사진을 찍던 그때의 시선이, 지금 다시 봐도 여전히 따뜻하고 평화롭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홍대 앞에서 포착한 커플의 뒷모습, 캄보디아의 가난한 도시에서 아이 둘이 앞에 서 있고 아버지가 생계를 이어가는 장면, 관광객으로 가득 찬 축제 한복판에서 유독 고요한 한 사람의 모습. 사진 속 인물들은 말을 하지 않지만, 삶은 충분히 읽힌다. 그의 사진은 사건보다 사람이 머문 시간에 반응한다.

사진은 늘 뒷모습에서 시작한다. 멀리서, 설명 없이. 그리고 천천히 가까워진다. 그가 직접 말했듯, 이번 전시는 “먼 데서부터 시작해 갈수록 가까워지는” 구조를 취한다. 뒷모습, 측면, 다시 얼굴. 시선의 이동은 곧 삶을 대하는 거리의 변화다.

“가깝게 가서 뭘 하는지는 모르지만,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이 되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 짐작의 힘이 이 전시를 지탱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그의 거리 감각이다. 그는 가까이 가지 않는다. 대신 오래 본다. 페트라에서 행상에 나선 아이를 찍을 때도 관광객을 일부러 프레임에서 밀어냈다. 흔한 대비 구도를 피한 선택이다. 결과적으로 사진에는 아이와 당나귀만 남는다. 그는 그 장면을 두고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이 전시는 연출이 아니라, 그런 마음의 기록에 가깝다.

그래서 그는 비극적인 장면, 과도하게 슬픈 이미지, 의미를 과잉 생산하는 사진들을 의도적으로 제외했다.
“보고 편안한 사진, 다시 보고 싶은 사진만 남겼다”는 그의 기준은 전시 전체의 온도를 결정한다.

◆ 50년의 기록, 그러나 지금에서야 꺼낸 이유
그는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찍은 사진으로 상을 받으며 처음 사진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이후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사진은 늘 곁에 있었지만, 전시는 선택하지 않았다.

“확신이 없었다”는 말이 반복해서 나왔다. 이번 전시는 확신이 생겨서가 아니라, 확신이 없는 상태 그대로 평가를 받아보고 싶어 선택한 자리에 가깝다.

전시 준비 과정에서 그는 젊은 사진가들과 함께 사진을 다시 분류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찍어온 사진의 흐름을 처음으로 타인의 시선으로 확인했다.

“남의 눈으로 보니까, 내가 어떤 사진을 찍어왔는지가 보이더라.”

◆ 정치 하마평과의 거리, 그리고 분명한 선언
그의 이름 앞에는 여전히 서울시장, 국무총리 등 각종 정치적 하마평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그는 단호했다.
“그런 일과는 상관없다. 가능성은 제로(0)%다.”

이 말은 선을 긋기보다 자리를 옮겼다는 선언에 가깝다. 성장과 효율의 언어를 다뤄온 사람이, 이제는 관찰과 기다림의 언어로 세계를 읽겠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는 성과도, 결론도 없다. 대신 시간이 있다.

이번 전시는 그 선언의 연장선에 있다. 미래를 설계하던 기업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이미 지나간 순간들을 다시 바라보는 관찰자로 서겠다는 선택이다.

◆ 사진은 취미가 아니라 태도다
박용만의 사진은 기술을 과시하지 않는다. 연출도, 조작도, 극적인 장치도 없다. 다만 오래 바라보고, 조용히 기다린 시선이 남아 있을 뿐이다.

노숙인과 노인, 이름 없는 사람들, 그리고 압축성장이 남긴 도시의 틈새까지. 그의 사진은 개인의 얼굴을 통해 구조의 초상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 전시는 한 개인의 사진 데뷔전이 아니라, 한 시대를 통과한 관찰자가 남긴 잔상 기록에 가깝다.

그는 말했다.
“아름답고 따뜻한 사진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이쯤 오면 우리가 직면한 현실도 같이 생각했으면 했어요.”

이 말은 전시의 방향을 정확히 말해준다. 그의 사진은 개인의 삶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압축성장이 남긴 불균형의 풍경을 증언한다. 사람의 얼굴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사진은 말을 바꾼다. 개인의 시간이 아니라, 구조의 시간에 대해.

흥미로운 것은 그가 공간을 읽는 방식이다.

물의 반사를 지워 새와 물고기가 한 화면에 공존하는 듯 보이게 하거나, 창살 너머로 거친 바다를 바라보는 시선을 포착한다. 소란한 축제 한복판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고요를 건져 올린다.

그의 사진은 늘 프레임 안과 밖의 대비를 통해 세계를 읽는다. 보호받는 안과 거친 밖, 소음과 침묵, 속도와 정지가 한 장의 사진 안에서 나란히 놓인다.

“메시지는 없습니다. 그냥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의 말처럼 이 전시는 빠르게 소비되지 않는다. 한 장 앞에 서서 오래 머물게 만든다. 설명이 없어도 우리는 안다. 저 사람들이 지나온 시간, 지금의 관계, 그리고 서로를 대하는 마음을.

AI가 이미지를 대신 기억하는 시대에, 이 전시는 오래된 사진의 전시가 아니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회상의 속도를 지키려는 기록에 가깝다.

전시와 함께 HUMAN MOMENT도 동시 출간된다. 사진집에는 박용만 작가가 지난 50여 년간 기록해온 사진 200여 점이 수록되며, 전시보다 확장된 구성으로 그의 시선과 시간의 기록이 담겼다.

◎공감언론 뉴시스 hyu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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