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이재준 기자 = 주룽지(朱鎔基) 전 중국 총리가 12일 베이징에서 타계했다. 향년 98세.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국무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는 이날 공동으로 내놓은 부고에서 주룽지 전 총리는 오전 11시6분 베이징에서 지병으로 치료를 받던 중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했다.
부고는 주룽지 전 총리를 “중국공산당의 훌륭한 당원이자 오랜 기간 검증된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이며 “뛰어난 무산계급 혁명가이자 정치가, 당과 국가의 탁월한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주 전 총리는 중국공산당 제14기와 제15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을 지냈다.
그는 1928년 10월 후난성 창사(長沙)현 안서(安沙)진 허핑(和平)촌 탕포(棠坡)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주콴수(朱寬澍)는 주룽지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해 그는 유복자로 자랐다. 어머니도 그가 12세였을 때 병으로 숨졌다.
조실 부모했지만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1947년 후난성 제1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48년 12월 지하 공산혁명에 참여하고 1949년 10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47년부터 1951년까지 칭화대 전기공학과에서 전기기기제조를 전공하면서 신민주주의청년단 활동에 참가했다.
대학 졸업 후 동북공업부 계획처 생산계획실 부주임으로 일하다가 1952년 행정체제 개편으로 동북 인민정부가 폐지되자 중앙으로 올라와 국가계획위원회 연료동력국과 종합국 조장, 주임판공실 부처장, 기계국 종합처 부처장 등을 지냈다.
그러나 1957년 중국공산당이 ‘대명대방(大鳴大放)’ 운동을 시작하면서 고초를 겪었다.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독려하던 운동은 곧 지식인과 간부들의 비판적 의견을 문제 삼는 ‘인민을 유인해 나오게 한 뒤 공격한다’는 의미의 ‘인사출동(引蛇出洞)’ 방식의 반우파 투쟁으로 돌아섰다.
주룽지는 당시 국가계획위에서 의견을 제시했다가 ‘우파’라는 낙인이 찍혔다. 1958년 1월 직무에서 해임되고 당적도 박탈당했다.
그래도 국가계획위에 남아 1958~1969년 사이에는 간부여가학교 교원으로 수학·물리·화학을 가르치고 국민경제종합국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후 1970~1975년에는 국가계획위 산하 이른바 ‘5·7 간부학교’로 내려가 집단농장에서 채소를 재배하고 돼지를 키우는 노동을 했다.
문화대혁명 막바지인 1975년 중앙으로 복귀해 석유공업부 관도국 전력통신공정공사 사무실 부주임과 부주임 엔지니어, 중국사회과학원 공업경제연구소 실장 등을 역임했다.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를 계기로 ‘우파’라는 낙인이 벗겨졌고 당적과 직무도 회복했다.
3중전회는 경제와 민생을 다시 일으키는 데 정책의 중심을 두기 시작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이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實踐是檢驗真理的惟一標準)’이라는 방침을 제시하면서 개혁·개방과 4개 현대화가 추진됐다.
1979년 이후 국가경제위 연료동력국 처장, 종합국 부국장, 기술개조국 국장, 국가경제위원회 위원 등을 맡았으며 1983년에는 국가경제위 부주임과 당조원, 당조 부서기에 올랐다. 1986년까지 경제 분야의 핵심 기관에서 일했다.
주룽지의 정치 경력은 상하이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1987~1991년 상하이시 당위 부서기와 시장, 당 서기를 차례로 맡았다.
그는 상하이가 산업구조를 조정하고 새로운 발전 우위를 재편해 국제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대외지향형 경제를 발전시키는 길을 제시하면서 푸둥(浦東) 개발·개방이 실질적으로 시작하는 데 힘을 보탰다.
중국공산당은 주룽지가 상하이에서 추진한 정책이 “상하이의 한층 더 깊은 개혁·개방과 발전을 위한 견고한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1991년에는 국무원 부총리 겸 국무원 생산판공실 주임과 당조서기, 국무원 경제무역판공실 주임과 당조서기에 취임했다. 기계·전력·에너지, 철도·교통, 야금·화학공업, 경공업·방직업 등을 담당했다.
1992년 10월 중국공산당 제14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1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과 상무위원으로 선출, 국무원의 일상적인 업무를 총괄했다. 1993년 6월에는 중국인민은행 총재도 겸임하면서 ‘경제 차르’로 통했다.
주룽지는 덩샤오핑(鄧小平)의 남순강화 정신과 중국공산당 제14차 전국대표대회 방침을 적극적으로 시행하면서 개혁·개방과 현대화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대표적인 과제는 기업 간 연쇄적인 채무 문제인 ‘삼각채(三角債)’ 정리였다. 주룽지는 단순히 부채를 처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춰 기업의 경영 활력을 높이려 했다.
또한 거시경제 조정 방안을 마련하고 재정·금융 질서를 바로잡았다. 경제 과열을 억제하고 물가 상승을 안정시키면서 이른바 ‘연착륙’을 달성하기 위해 대규모 정책을 추진했다.
재정·조세 질서를 정비하고 재정 규율을 강화했으며 세금 징수를 엄격하게 관리했다. 재정·조세 개혁도 가속화하고 금융 거시조정 체계를 개선했다.
식량 가격과 구매·판매 제도 개혁 역시 밀어붙였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맞는 식량 유통체계를 구축하고 농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대규모 농가의 도급경영과 적정 규모의 영농을 발전시키려 했다.
주룽지는 1997년 9월 중국공산당 제15기 중앙위 1중전회에서 다시 중앙정치국 위원과 상무위원으로 뽑혔다.
1998년 3월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국무원 총리에 선임되고 이후 국무원 당조서기를 겸직했다.
그때 중국은 아시아 금융위기와 국내에서 발생한 대규모 홍수 피해에 동시에 직면했다.
주룽지는 당중앙의 방침에 따라 적정 수준의 긴축적 재정·통화정책에서 적극적인 재정정책과 안정적인 통화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내수를 확대하고 주요 분야의 개혁을 심화하면서 경제의 안정적이고 빠른 성장을 유지하는 데 주력했다.
산업구조와 지역구조, 도시·농촌 구조를 전면적으로 조정하고 첨단기술산업을 육성했다. 그중에서도 정보산업 발전에 힘을 쏟고 현대 서비스업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경제성장의 질과 효율을 높이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췄다.
‘삼농(三農)’ 문제인 농업·농촌·농민 문제도 주요 정책 과제로 삼았다. 지역 여건에 맞춰 농업구조를 조정하고 농촌 빈곤 퇴치와 개발을 강화하면서 도시와 농촌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했다.
대외개방과 수출 확대를 위해 일련의 정책도 시행했다. 위안화 평가절하를 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하고 시장 다변화 전략과 품질을 통한 경쟁력 강화 전략을 폈다.
외국인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국내외 두 시장과 두 종류의 자원을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홍콩의 국제금융센터로서 번영과 안정을 지키는데도 힘을 기울였다.
환경 보호와 생태환경 건설을 강화하고 토지와 광물 등 자원 관리도 엄격하게 했다. 주요 하천과 지역의 오염을 집중적으로 관리했다.
국유기업에서 해고된 노동자의 기본생활 보장제도와 실업보험, 도시 주민 최저생활보장제도를 강구했다. 체불 임금 문제와 해고 노동자의 재취업 문제를 해결하는데 매진했다.
정부 기능을 지속적으로 전환하고 정부기관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정부 자체의 운영과 관리체계를 강화했다.
총리 재임 중에는 중앙 전문위원회 주임, 국가경제체제개혁위원회 주임, 국가과학기술교육영도소조 조장, 국무원 싼샤공정건설위원회 주임, 국가국방동원위원회 주임, 국무원 서부지역개발영도소조 조장 등을 겸임했다. 경제체제 개혁과 과학기술, 교육, 서부대개발, 국방공업 등의 분야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주룽지가 국무원 부총리와 총리를 맡은 시기는 중국이 계획경제 체제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장쩌민(江澤民)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 중앙의 지도 아래 주룽지는 재정·조세 체제 개혁을 주도했다.
세금 부담의 공평성과 세제 간소화를 핵심으로 하는 대규모 세제 개혁을 전면적으로 전개하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권한과 책임을 합리적으로 나누는 것을 바탕으로 분세제 재정체제를 도입했다. 농촌 세금·부담 개혁 역시 시범적으로 실시했다.
금융체제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중앙은행의 기능을 더욱 명확히 하고 상업은행과 외환제도, 증권·선물시장 등의 개혁을 심화했다.
전국적으로 통일되고 개방된 가운데 질서 있는 경쟁과 엄격한 관리가 이뤄지는 금융시장 체계를 세우는데 기여했다.
국유기업 개혁은 경제체제 개혁의 핵심 과제로 삼았다. ‘재산권이 명확하고 권한과 책임이 분명하며 정부와 기업을 분리하고 과학적으로 관리한다’는 원칙에 따라 현대기업제도 구축을 서둘렀다.
국유경제의 배치를 전략적으로 조정하고 국유기업을 재편했다. 동시에 해고·실업 노동자의 재취업을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사회보장체계 구축을 강화했다.
주택제도 개혁를 주도했다. 주택을 국가나 직장에서 배분하는 방식에서 점차 화폐를 통한 주택 구매 방식으로 바꾸고 경제적용주택을 중심으로 여러 유형의 도시 주택 공급체계를 구축하고 개선했다.
식량 유통체제 개혁을 계속 심화했다. 보호가격을 적용해 농민의 잉여곡물을 개방적으로 수매하고 국유 식량기업이 적정 가격으로 판매하도록 했다.
식량 수매 자금은 별도로 관리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이후 주요 소비지역의 식량 수매시장과 가격을 점진적으로 개방했다.
사회보장체제와 의료·보건체제, 투자·융자체제 등 일련의 대규모 개혁도 지휘했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기본 틀을 만드는데 애를 썼다.
아울러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위한 어려운 협상을 마무리하는 작업을 총괄하면서 중국의 대외개방을 폭과 깊이 양쪽에서 확대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주룽지는 국민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강조하면서 정부 공무원들이 자신을 국민의 공복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한 성격과 직설적인 언행으로 유명한 주룽지는 공무원들이 진실을 말하고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특별대우를 받으려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강한 책임 의식을 갖고 어려운 일과 힘든 과제를 스스로 떠맡아 국민을 위해 실질적인 일을 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주룽지는 퇴임 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크게 줄었다. 마지막 공식석상은 2017년 10월24일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 폐막일이었다. 당시 그는 백발이 된 모습이었다.
2019년 9월 30일에는 중국 건국 70주년을 기념하는 톈안먼 열병식과 전날 열린 국경절 초대회에 참석하지 않으면서 건강 상태를 둘러싼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2020년 10월23일 92번째 생일에는 병원에서 생일을 축하하는 모습으로 알려진 사진이 인터넷에 퍼졌다. 사진에는 마스크를 쓴 의사와 간호사 10여명이 주룽지에게 박수를 보내는 모습이 담겼다. 가운데 앉은 주룽지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었고 부인 라오안(勞安)도 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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