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K-팝이 인공지능(AI)과 빠르고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술의 단순한 다량 도입을 넘어, K-팝 생태계 자체가 이미 AI를 검증하고 안착시키기에 최적화된 ‘거대한 실험실’이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문화산업 사회학자인 고윤화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 연구원은 4일 서울 상암 큐브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26 MWM 콘퍼런스’에서 ‘AI가 다시 쓰는 K-팝의 공식’을 주제로 오픈 세션 발표에 나섰다.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콘진원)이 주관하는 글로벌 뮤직 마켓 ‘뮤콘(MU:CON 2026)’과 연계해 사단법인 한국대중음악산업협회(대음협)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서 고 연구원은 “AI는 외계에서 갑자기 나타난 단절적 기술이 아니라 음원의 디지털화, 플랫폼 중심화, 데이터 기반화를 거치며 음악 산업에 축적된 구조 변화의 연장선”이라며 운을 뗐다. 특히 K-팝이 생성형 AI의 가장 유력한 시험대가 된 배경으로 산업 고유의 ‘실험실적 조건’을 꼽았다.
‘AI와 음악 산업'(2025) ‘AI와 케이팝'(2026) 등을 펴낸 고 연구원에 따르면 K-팝은 이미 다수의 작곡진이 협업하는 고도화된 공동 창작(Co-writing) 체계, 디지털화된 글로벌 네트워크, 데이터 기반의 기획 체계, 크리에이티브 허브로서의 기획사, 고도화된 디지털 플랫폼, 그리고 능동적인 글로벌 팬덤을 고루 체득하고 있었다. 이 요소들이 단선적 공정이 아니라 실시간 피드백과 다층적 상호작용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환경 자체가 이미 AI를 실험하기에 최적화된 조건이었다는 진단이다.
그는 원더걸스의 ‘텔 미’, 슈퍼주니어의 ‘쏘리 쏘리’ 등 과거 후크송으로 대표되던 히트 공식의 탐색이 AI를 만나 그 가능성의 풀(Pool)을 비약적으로 넓히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AI는 현장의 창작자를 대체하기보다 각 영역에서 창작 역량과 협업 범위를 넓히는 ‘확장(Augmentation)’의 도구로 작동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기획사의 역할 역시 과거의 획일적인 통제에서 벗어나 창작의 여지를 유연하게 열어두는 ‘루즈 컨트롤(Loose Control)’로 나아가고 있다고 짚었다.
발표의 후반부는 AI 시대 K-팝이 마주한 가장 본질적인 화두인 ‘진정성’과 ‘신뢰’로 향했다.
고 연구원은 대중음악학자 사이먼 프리스와 미디어학자 헨리 젠킨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진정성은 고정된 결과물이 아닌 음악과 청자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며 오늘날의 팬들은 결과물뿐 아니라 제작 과정과 기술의 개입까지 주체적으로 해석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대중이 AI 음악에 느끼는 심리적 거리감의 원인으로는 ‘서사(Story)’의 부재를 지적했다. 글로벌 슈퍼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음악이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일곱 멤버가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고뇌하고 부딪히며 살아온 진솔한 삶의 궤적이 음악 안에 온전히 녹아 있기 때문인데, AI 결과물에는 이러한 인간적 맥락이 결여돼 있어 수용자가 무엇을 믿고 느껴야 할지 혼란을 겪는다는 것이다.
고 연구원은 팬들이 음악 속에서 진정성을 느끼고 주체적으로 해석(Interpretation)하기 위한 3대 조건으로 ‘가시성(Visibility)’, ‘설명 가능성(Explainability)’, ‘선택권(Choice)’을 제시했다. AI 생성 표기(레이블링) 등 투명성 확보 방안은 창작을 옥죄는 규제가 아니라, 창작자와 팬 모두에게 건강한 선택의 기준점을 건네는 장치라는 설명이다.
고 연구원은 “AI 시대의 신뢰는 기술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AI의 개입을 온전히 이해하고 선택할 수 있는 조건에서 형성된다”며 “AI의 개입을 정직하게 공개하고 설명함으로써 수용자에게 주체적 선택권을 제공하는 투명성과 신뢰야말로 기술 전환기 K-팝이 지켜내야 할 궁극적인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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