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섭 AI 진테제] 영화 ‘오디세이’로 본 AI의 사실과 진실

[지디넷코리아]

극장이 어두워지고 가장 먼저 뜬 것은 배우의 얼굴이 아니라 한 줄의 자막이었다. “In a time of Apparent Magic.” 겉보기 마법의 시대. 나는 이 여섯 단어가 현재 화제를 모으고 상영중인 영화 오디세이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관객에게 건넨 해석의 열쇠라고 생각한다. 마법의 시대가 아니라 ‘겉보기’ 마법의 시대. 앞으로 등장할 외눈박이 거인과 마녀와 세이렌과 망자들의 해변과 바다의 소용돌이는 실재가 아니라 명명이라는 선언이다. 한 시대가 이해하지 못한 힘에 붙인 이름이라는 선언.

그리고 영화의 처음과 끝, 크레딧에는 짧은 시구가 반복된다. 하나의 얼굴에서 시작해 함대로, 전쟁으로, 한 남자로, 하나의 생각으로, 하나의 ‘속임수’로 이어지다가, 그 속임수가 트로이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도시를 불태우는 데서 끝나는 시다.

얼굴, 함대, 전쟁, 남자, 생각, 속임수. 이 여섯 단어가 이 영화의 지도다. 그런데 시는 트로이가 불타는 장면에서 멈춘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정확히 그 다음의 이야기다. 속임수 이후의 이야기. 말하자면, 계산서의 서사다.

이 글은 그 지도를 따라간다. 전반부는 시가 말하는 것, 한 시대를 끝낸 속임수의 해부학이다. 후반부는 시가 말하지 않는 것, 그 속임수의 값을 치르는 십 년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3천 년 전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봉 전 이 영화를 둘러싼 가장 큰 논란은 헬레네 캐스팅이었다. 트로이 전쟁은 헬레네의 미모 때문에 일어났는데, 왜 우리가 기대한 인종과 외모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논란 자체가 영화의 논지를 증명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그 신화를 믿고 있다. 천 척의 배를 띄운 것이 한 여자의 얼굴이라는 신화 말이다.

놀란의 답은 명료하다. 이 전쟁은 얼굴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다. 영화에서 아가멤논이 원한 것은 헬레네가 아니라 트로이가 쥐고 있던 무역로다. 트로이는 흑해로 들어가는 해협의 관문에 앉아 통행의 값을 받던 도시였고, 그 길목을 원하던 권력에게 필요한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구실이었다.

헬레네는 개전의 여신이 아니라 개전의 보도자료였던 셈이다. 크레딧의 시가 그녀를 ‘얼굴 하나’로만 부르는 것은 그래서 정확하다. 서사가 소비한 이미지. 실제의 그녀는 얼굴에 흉터를 지닌 채 등장하는데, 그 흉터를 어떻게 읽을지는 관객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분명한 것은 하나다. 이 전쟁에서 그녀의 외모는 단 한 번도 중요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헬레네는 스파르타를 떠나는 텔레마코스를 안으며 속삭인다. 내 이름으로 자행된 모든 전쟁에 대해 사과한다고. 그 속삭임은 화면 속 청년이 아니라 객석을 향해 있는 것처럼 들렸다. 이 문장은 잠시 접어두자. 글의 끝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 시대의 헬레네는 무엇일까. 나는 ‘AGI가 인류를 구원한다’는 서사를 떠올린다. 천 척의 배를, 그러니까 수천억 달러의 자본을 띄우는 공식 명분. 그 뒤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것은 해협의 쟁탈전이다. 데이터라는 항로, 전력이라는 항로, HBM과 파운드리라는 항로. 전환기의 전쟁은 언제나 항로를 놓고 벌어지고, 언제나 로맨스로 서사화된다.

함대를 띄우기 위해 아가멤논은 자기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쳤다. 명분의 전쟁은 남의 것을 태우기 전에 자기 것부터 태운다. 그리고 이타카처럼 전쟁을 원치 않던 작은 왕국들도 결국 배를 띄웠다. 영화 속 이타카는 참전을 바라지 않았지만 아가멤논의 정치적 압박 앞에서 선택지가 없었다. 명분이 거대해질수록 참전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된다. 오늘의 언어로 옮기면, 모두가 원해서 이 경주에 뛰어든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전쟁의 결말도 기록해두자. 아가멤논은 승자로 귀향했으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손에 죽는다. 딸을 제물로 바친 자에게 돌아온, 명분이 있는 죽음이었다. 나는 이 대목을 지금의 기득권을 향한 경고로 읽었다. 제국은 바다 건너의 적에게 무너지지 않는다. 자신이 제물로 바친 것들에 의해, 집 안에서 무너진다. 성장을 위해 창작 생태계를 제물로 바친 플랫폼과, 트래픽을 위해 저널리즘을 제물로 바친 미디어를 떠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계산서는 언제나 집으로 온다.

안광섭 세종대 겸임교수

십 년의 공성전이 뚫지 못한 성벽을 뚫은 것은 청동도 철도 아니었다. 나무에 담긴 하나의 생각이었다. 크레딧의 시가 함대와 전쟁 다음에 ‘한 남자, 하나의 생각’을 놓는 순서는 그래서 정확하다. 청동기의 성벽이라는 하드웨어를 무너뜨린 것은 더 강한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였다.

해외 평단은 일찌감치 이 영화를 ‘오펜하이머’의 청동기 버전으로 읽었다. 자신의 발명이 세계를 끝냈다고 두려워하는 창조자의 이야기. 틀린 독해는 아니지만 절반짜리라고 생각한다. 폭탄은 물리력이다. 목마는 물리력이 아니라 신뢰를 착취했다. 폭탄보다는 해킹에 가깝다.

목마가 작동한 원리를 보자. 영화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제우스의 율법’은 그리스인들이 크세니아(xenia)라고 부른 것이다. 놀란 스스로 내한 인터뷰에서 낯선 이를 존중하고 환대하라는 이 고대의 규범에 주목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손님과 주인은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 선물과 봉헌물은 존중한다. 낯선 자를 확대하라, 누구든 변장한 신일 수 있으니. 법전도 경찰도 국제기구도 없던 청동기 지중해에서 교역과 외교와 여행을 가능하게 한 운영체제가 이것이었다. 강제력은 없다. 모두가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 유일한 담보다. 이 율법의 세계에서 폴리페모스가 괴물인 이유는 외눈 때문이 아니다. 손님을 잡아먹는 주인이기 때문이다.

트로이 전쟁은 이 율법의 위반으로 시작됐다. 손님으로 머물던 파리스가 주인 아내를 데리고 떠났다. 그리고 이 율법 위반으로 끝났다. 그리스군은 아테나에게 바치는 봉헌물 형식으로 목마를 남겼고, 트로이는 봉헌물을 존중해야 한다는 규약에 따라 그것을 성 안으로 들였다. 목마는 성벽 취약점을 공략한 무기가 아니다. ‘봉헌물은 의심하지 않는다’는 프로토콜 취약점을 공략한 착취다. 인류 최초의 소셜 엔지니어링. 컴퓨터 보안이 신뢰를 가장해 침투하는 공격에 지금도 ‘트로이 목마’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스에게 이것은 지략이다. 트로이에게 이것은 신성모독이다. 그리고 놀란의 오디세우스는 불타는 트로이에서 병사들이 저지르는 일들을 지켜보며, 자신이 무엇을 풀어놓았는지 깨닫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시는 여기서 끝난다. 계산서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제 3천 년을 건너뛰어보자. 오픈웹에도 제우스의 율법이 있다. 1994년에 만들어진 robots.txt라는 작은 텍스트 파일이다. robots.txt는 웹사이트의 검색엔진 크롤러(로봇)가 어떤 페이지를 수집해도 되는지 알려주는 안내 파일이다. 쉽게 말하면, 검색엔진에게 우리 사이트의 출입 규칙을 알려주는 파일이다. 웹사이트가 크롤러에게 건네는 안내문으로 여기까지는 들어와도 좋고, 저 방에는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다. 법적 강제력은 없다. 2022년에야 정식 인터넷 표준이 됐지만 그마저 준수는 자율이다. 30년 동안 오픈웹을 지탱한 것은 법이 아니라 이 명예 규약이었다. 서로의 문턱을 존중한다는 믿음. 바로 디지털 크세니아다.

지난 몇 년간 AI산업이 한 일을 트로이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환대의 규약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가, 성을 지탱하던 것을 가지고 나왔다. robots.txt를 우회하는 크롤러, 이용약관을 스치듯 지나가는 학습, 모델에서 모델로 이어지는 증류. 산업의 언어로는 스케일링이고 데이터 플라이휠이다.

웹의 언어로는 신전 방화다. 같은 행위가 승자의 서사에서는 지략이 되고, 성벽 안쪽의 서사에서는 율법의 위반이 된다. 목마가 그랬듯이. 그 사이에서 새로운 감수성도 자라났다. 규약을 지키는 쪽이 고루해 보이고, 우회하는 쪽이 혁신이라 불리는 감수성. 혁신은 파괴에서 온다는 말은 절반의 진실이다. 나머지 절반은, 현대 사회가 법치 위에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포세이돈이 분노한다. 호메로스에게 오디세우스의 십 년 표류는 신의 저주였지만, 우리의 버전에서 그것은 커먼즈의 반격이다. 페이월이 올라가고, AI 크롤러는 기본값으로 차단되고, 소송이 쌓이고, 어제까지 공짜였던 데이터에 가격표가 붙는다. 세계 최고의 함대, 그러니까 자본과 컴퓨트와 변호사를 가진 산업이 정당성이라는 항구에 닿지 못한 채 표류하는 중이다.

아이러니는 여기에 있다. AI가 도달해야 할 집, 즉 지속가능한 비즈니스와 사회적 신뢰, 그리고 무엇보다 에이전트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웹으로 가려면 반드시 바다를 건너야 한다. 그런데 그 바다가 정확히, 자신이 분노하게 만든 바로 그 바다다. 에이전트의 시대가 가까워질수록 이 저주는 무거워진다. 웹을 읽고 클릭하고 결제해야 하는 에이전트에게, 문을 닫아건 웹은 항해할 수 없는 바다다.

영화 내내 인물들은 ‘바다 건너의 존재’를 두려워한다. 메넬라오스도, 이타카의 원로들도, 정착지를 닥치는 대로 불태운다는 해양 민족의 소문을 입에 올린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다가오는 새로운 문명, 그러니까 철기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라이스트리고네스 같은 무지막지한 존재들도 그 상징으로 읽었다. 그런데 영화의 답은 더 어둡다. 해양 민족의 실체는 트로이에서 돌아가는 그리스 병사들 자신이다. 전쟁이 풀어놓은 폭력이 지중해를 떠돌며 도시들을 태운다. 문명을 끝내는 것은 바다 건너의 야만이 아니라, 지난 전쟁의 승자들이다.

이것은 실제 역사와 공명한다. 기원전 1200년 무렵, 미케네와 히타이트와 우가리트가 반세기도 안 되는 사이에 무너진 후기 청동기 붕괴가 있었다. 이집트의 기록에 ‘바다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남은 정체불명의 침입자들이 그 시기를 휩쓸었다. 그리고 그 폐허 위에서 철기가 시작된다. 왜 하필 철이었을까. 청동은 네트워크의 금속이다. 구리와 주석이 각각 먼 곳에서 와야 하고, 그래서 청동기 문명은 곧 원거리 교역망의 문명이었다. 철은 로컬의 금속이다. 어디에나 있는 광석. 교역망이 끊기자 청동은 만들 수 없는 금속이 되었고, 철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여기서 이 이야기의 가장 서늘한 문장이 나온다. 무역로를 차지하려던 전쟁이 무역로 자체를 죽였고, 그것이 청동기의 종말이었다. 승자가 손에 넣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항로였다. 데이터를 차지하려는 전쟁이 오픈웹을, 그러니까 그 데이터가 자라나는 커먼즈를 죽인다면 우리는 같은 구조 안에 있는 것이다. 모두가 퍼가기만 하고 아무도 쓰지 않는 웹, 합성 데이터가 합성 데이터를 학습하는 웹은 항로가 끊긴 바다다.

영화에서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에게 말한다.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사라질 테니, 우리의 이야기는 노래로만 남을 것이라고. 이것은 시적 과장이 아니라 고고학이다. 실재로 붕괴 이후 그리스는 선형문자 B를 잃었고, 약 400년 동안 문자 없는 시대를 살았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구전으로 태어난 이유가 그것이다. ‘오디세이아’는 한 세계를 끝낸 전쟁의 이야기를, 그 세계가 끝난 뒤의 사람들이 기억만으로 이어 부른 노래다. 영화가 자기 원작이 존재하게 된 이유를 극중 대사로 예언하는 셈이니, 놀란다운 구조적 농담이기도 하다.

이 대사에서 나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를 떠올렸다. 방향이 반대라는 점이 흥미롭다. 파이드로스에서 문자의 신 테우트는 이집트의 왕 타무스에게 문자를 바치며 말한다. 이것은 기억과 지혜를 위한 약이라고. 왕은 답한다. 이것은 오히려 망각을 낳을 것이다. 사람들은 밖에 적힌 기호를 믿고 안의 기억을 놓을 것이며, 지혜가 아니라 지혜의 겉모습을 갖게 될 것이라고. 겉모습. 영화의 첫 자막이 다시 떠오르는 대목이다. 겉보기 마법의 시대. 그리고 나는 우리가 매일 쓰는 두 글자의 약자를 다시 읽게 된다. Artificial Intelligence가 아니라 Apparent Intelligence. 겉보기 지능의 시대.

타무스의 경고 이후로 모든 인지 기술은 같은 재판을 받아왔다. 문자가, 인쇄술이, 검색엔진이 차례로 피고석에 앉았다. 그때마다 인류는 무언가를 밖으로 내보냈고, 그 대가로 다른 것을 얻었다. 문제는 교환 자체가 아니다. 무엇을 내보냈는지 잊는 것이다. 붕괴가 온다면, 그것이 신뢰의 붕괴든 웹의 붕괴든 그저 어느 날의 서비스 종료든, 우리의 선형문자 B는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이 노래로 남을까.

놀란의 각색 가운데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로터스와 칼립소의 결합이다. 원전에서 로터스를 먹는 자들의 섬과 칼립소의 섬은 별개의 에피소드다. 놀란은 둘을 하나로 묶었다. 내한 당시 박찬욱 감독과의 대담에서도 언급된 각색이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로터스 꽃을 먹여 기억을 지우고 칠 년을 곁에 붙잡아둔다. 전쟁도, 죄책감도, 페넬로페도,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은 채로. 그 섬의 생활은, 굳이 말하자면 편안하다.

로터스는 편안한 망각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우리가 인공지능과 맺고 있는 관계의 한 단면을 보았다. 결과물은 즉시 오고, 충분히 그럴듯하고,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인지적으로 편안한 일이다. 전작 ‘생각을 맡기는 사람들: 호모 브레인리스’에서 짚었던 바로 그 지점이다. 생각을 맡기는 편안함은 공짜가 아니다. 로터스의 무서움은 고통이 아니라 달콤함에 있다. 오디세우스가 잃은 것은 항해술이 아니라, 항해해야 할 이유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런데 칼립소가 출구의 조건을 일러준다. 네가 저지른 모든 죄를 받아들이고 용서를 구하면, 그토록 원하던 고향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망각의 낙원에서 나가는 문의 비밀번호는 고백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급진적’인 장면이 온다. 훌륭한 배와 충성스러운 선원들을 데리고도 십 년을 표류하던 남자가, 죄를 받아들이고 바다에 자신을 맡긴 뒤에는 얇은 판자 하나로 수일 만에 이타카에 닿는다. 함대로 못 간 집을 판자로 간다.

이 역설을 산업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정당성은 톤수에서 나오지 않는다. 정산에서 나온다. 더 큰 모델, 더 많은 GPU, 더 강한 로펌은 결국 더 큰 함대일 뿐이다. 집으로 가는 길은 다른 쪽에 있다. 가져온 것의 값을 치르는 것. 콘텐츠 라이선스 계약, 동의의 표준, 출처의 표시, 크롤러의 에티켓, 커먼즈로의 환류. 실제로 바다가 조금씩 열리는 곳들을 보라. 소송이 벌어진 항구가 아니라 계약이 체결된 항구들이다.

개인의 버전도 같다. 판자는 반기술이 아니다. 오디세우스는 바다를 거부해서 집에 간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서 갔다. 판자는 최소한의 도구와 회복된 항해술의 조합이다. 도구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도구 위에서 잠들지 말라는 것이다. 로터스를 끊는다는 것은 AI를 끊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맡기고 무엇을 맡기지 않을지에 대한 기억을 되찾는 일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오디세우스는 텔레마코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페넬로페와 함께 묻어주지 못한 이들을 기리는 항해를 떠난다. 서쪽으로. 처음에 나는 그 서쪽이 이탈리아나 이베리아일까, 로마의 예고일까 생각했다. 지금은 단테가 먼저 떠오른다. ‘신곡’ 지옥편 스물여섯 번째 노래에서 단테는 오디세우스를 기만의 조언자들 사이에 세워뒀다. 죄목의 첫머리가 트로이 목마다. 그리고 단테의 오디세우스는 헤라클레스 기둥 너머 서쪽으로 항해하다 소용돌이에 삼켜진다. 놀란 스크린에서 본 그 소용돌이가 겹쳐 보이는 대목이다.

서구 문명은 이 속임수를 한 번도 만장일치로 사면한 적이 없다. 승자의 서사시인 호메로스와, 트로이 유민이 세운 로마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사이에서 목마는 3천 년째 재판 중이다. 다음 질서의 법과 서사는 종종 패자의 상속자들이 쓴다. AI 시대의 아이네이스는 누가 쓰게 될까.

그러나 놀란의 결말은 지옥이 아니다. 왕관을 쓴 텔레마코스가 있고, 문명은 언젠가 돌아올 것이며 우리는 견뎌낼 것이라고 말하는 페넬로페가 있다. 전환기의 서사는 파국으로 끝나지 않는다. 상속으로 끝난다. 다음 세대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 이후를 물려받는다. 그리고 나는 헬레네의 속삭임으로 돌아온다. 내 이름으로 자행된 모든 전쟁에 대한 사과. 그 말은 텔레마코스가 아니라 우리를 향해 있었다.

언젠가 우리가 만든 지능도 같은 문장을 말하게 될까. “제 이름으로 자행된 전쟁들에 대해 사과합니다” 라고. 칼립소의 조건이 옳다면, 그러니까 집으로 가는 길이 고백을 지나간다면, 그 문장을 기계가 배우기 전에 우리가 먼저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겉보기 마법의 시대에 진짜 마법은 아마 그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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