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관객은 종종 영화감독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액션을 잘 찍는다’라거나 ‘대사를 잘 쓴다’고. 혹은 ‘미장센에 강점이 있다’거나 ‘독특한 감성을 지녔다’고 표현한다. 또는 ‘시대를 꿰뚫어보는 통찰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다 필요 없고 일단 재밌고 웃기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대부분 영화 한 부분에 관한 말들이다. 그런데 나홍진(52) 감독과 그의 영화에 관해 이야기할 땐 늘 조금 다른 언어가 튀어나온다. 그건 어쩌면 나 감독의 성정(性情)에 관한 것들인 것 같다. 야심이나 자신감 같은 말들 말이다.
2008년 ‘추격자’로 데뷔해 오는 15일 개봉하는 신작 ‘호프’까지 20년 간 그가 내놓은 영화는 딱 4편이다. 두 번째 영화 ‘황해’가 2010년에 나왔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는 16년 간 ‘곡성’과 ‘호프’ 2편을 만든 셈이다. 과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간격이다. 그래도 관객은 그의 영화를 기다린다. 오래 걸리긴 하나 나 감독이 뭔가를 보여줄 거라고 철썩같이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영화를 향한 이 신뢰는 나 감독이 지닌 저 야심과 자신감 떄문인 것만 같다. 새로운 걸 보여주고 말겠다는 의지, 비전을 현실화 하는 집념, 그리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뚝심을 관객이 피부로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난 7일 만난 나 감독은 156분에 달하는 상영시간과 전반부 범석(황정민)이 사실상 홀로 이끌어가는 약 50분에 걸친 장면에 관해 얘기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는 도전장이죠. 나 이런 걸 할 테니까 한 번 봐, 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전반부에 관한 얘기를 덧붙엿다. “전반부는 아주 전형적인 상황을 보여주죠. 이런 영화에 꼭 나오는 장면이란 겁니다. 그런데 그걸 오히려 더 확장을 해버렸습니다. 텍스트로만 보면 ‘범석이 괴물을 찾아서 동네를 헤맨다’이지만, 전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오케이, 티피컬하게 갈게. 그런데 죽여주게 만들어줄게’라고요. 장르영화의 비주얼과 사운드를 최대치의 기교로 끌어올리는, 목표치를 극대화하는 그런 시도인 거죠.”
‘호프’는 비무장지대에 인접한 가상 도시 호포항 출장소장인 경찰 범석이 동네청년들에게 호랑이가 나타난 것 같다는 제보를 받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정말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왔다면 주민 피해가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범석은 읍내로 향하고, 그는 그곳에서 온 마을이 초토화된 상황을 목격한 뒤 충격에 빠진다. 이제 범석은 도대체 이게 무슨 아수라장인지 확인하기 위해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한다.
나 감독 새 영화엔 그의 야심이 들끓어 넘친다. 별의별 총기가 난무하고 도끼와 톱과 칼이 나뒹군다. 경찰차와 트럭과 말이 뒤엉키고, 논과 마을과 숲과 도로를 오간다. 추적하고 도망가고 함께 뛰고 질주하다 폭주한다. 온갖 인간이 뒤섞이는데 각종 크리쳐까지 엉겨붙는다. 소달구지와 우주선과 전함이 함께 나오고, 뜯기고 잘리고 터지고 폭발한다. 이 난장판 속에서 나 감독은 팔자 좋은 농담을 늘어놓고, 부러 전개속도를 늦추고 늘어뜨리기까지 한다. 그래서 어떤 대목에선 자신이 러닝타임을 장악하고 있다는 걸 과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 매번 네거티브한 이야기에 끌리는 것 같아요. 항상 그렇죠. 이번엔 또 어떤 이야기를 해볼까, 라고 했을 때 제 퍼스펙티브가 끝까지 간 겁니다. ‘곡성’에선 초자연적인 것으로 나아갔다면 이번엔 거기서 더 간 겁니다. 우주로 간 거죠. 초자연적 존재를 넘어선 그 정점에 있는 존재로요. 아마 관객은 그걸 다 느끼실 겁니다. 이런 영화라면 이야기는 심플해져야 했습니다. 전 얼마나 더 심플해질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제가 구상한 서사는 영화가 담은 내용보다 더 길게 있습니다만 이정도로 플롯팅을 한 겁니다. 물론 더 얘기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더 얘기하는 건 중언이라고 봤던 겁니다.”
‘호프’ 순제작비(홍보 비용을 뺀 영화를 만드는 데만 쓴 돈)는 약 500억원으로 알려져 있다. 단일 영화로는 역대 한국영화 최대 제작비다. 나 감독은 2018년 이 영화를 처음 기획할 때부터 제작비를 생각했다. “돈이 많이 들겠다 싶었죠.” 그러면서 나 감독은 당시 한국영화계 상황을 먹구름이 막 올려오던 때였다고 떠올렸다. “이제 내수용으로 영화를 만들어선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승산이 없는 거죠.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수익을 내는 구조를 만들지 않으면 힘들어 보였어요.” 지난 5월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호프’는 200개 나라에 판매됐다. 한 마디로 팔 수 있는 곳엔 다 팔았다. 이것 역시 역대 최고액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매우 한국적이면서 한국적이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한국적이지만 한국적이지 않은 그 절묘한 지점에서 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죠. 또 이런 것도 있습니다. 한국 관객은 한 영화에 모든 장르가 다 나오는 걸 좋아하시죠. 그래서 이번에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장르의 특성과 색감을 강화하기도 했어요. 예측할 수 있는 장르물을 만들어야 (해외에서도) 승부가 가능하니까요. 그러면서도 퀄리티를 최대한 높여야 했고요. 단순한 결정은 없었어요. 몇 천개 요소가 다 어우러진 결정인 거죠.”
나 감독은 ‘호프’에 모든 걸 쏟아붓는 듯했다. 신작을 최상의 상태로 관객에게 내놓기 위해 어제도 일했고 오늘도 일해야 하며 개봉 전날까지 손을 볼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영화를 만들면서 이렇게까지 고생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 내 소원은 원 없이 잠을 자는 거다”고 말할 정도였다. “제 영화 나온지 10년 됐다고 하시는데, 전 그렇게 안 느껴집니다. 체감이 안 돼요. 그동안 일이 너무 너무 많았거든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일했습니다.”
나 감독은 촬영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고 했다. 오래 걸린 건 프리프로덕션과 포스트프로덕션이었다고 했다. 그는 그간의 과정을 짧게 훑었다. “이 영화는 공정이 너무 복잡하고 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2018년에 처음 기획할 때 이걸 어떻게 찍어야 할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저도 그랬고요. 장비도 없었으니까요. 저와 스태프가 학습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또 시행착오를 겪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하여튼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일들이었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한국영화시장 상황에 역대 최대 제작비라는 말이 합쳐지며 현재 한국영화 전체가 ‘호프’를 바라보고 있다. ‘호프’를 응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영화계 사람들과 얘기하다보면 “무조건 잘돼야 한다”는 말과 “만약 안 되면 영화계 전체가 흔들릴 거다”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나 감독은 “왜 나한테 그러냐. 10년만에 영화 나오는데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부담스럽다”고 농담 섞인 말을 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하는 것 밖에 없어요.”
‘호프’가 개봉하면 아마도 이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두고 ‘곡성’ 때 못지 않게 말들이 쏟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이 영화는 다시 한 번 들여다볼 것들과 해석해봐야 할 것들로 빼곡하다. 나 감독은 “명확하게 만드는 게 오히려 오해를 부른다. 명확하게 만들면 오히려 부정당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400석짜리 상영관에 400명이 있다면 전 그걸 400명이라는 덩어리로 뭉뚱그려 보지 않아요. 각기 다른 400명으로 보죠. 그렇게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영화를 안 듭니다. 이 영화는 제 것이 아니라 보는 분들의 것입니다. 한 분 한 분이 정성스럽게 고민해서 그 한 분만의 이해로 이 영화로 종결지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관객 여러분에게 바로 그렇게 다가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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