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뉴시스] 이윤희 특파원 = 국제형사재판소(ICC) 재판관 출신 나비 필레이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된 9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ICC에 대한 전면 제재를 발표했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이날 성명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ICC가 미국인들을 기소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면서 “그러한 이유로 오늘 미국은 ICC에 제재를 가한다. 이 불량 재판소와 거래를 금지해 자원을 차단하고 운영 능력을 마비시킬 것이다”고 밝혔다.
미국은 그간 ICC 재판관이나 검사 등 개인을 겨냥해 제재를 가했으나, 이날 조치는 재판소 전체로 제재를 확대한 것으로 평가된다.
국무부가 공개한 설명자료(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 내에 있거나 미국인이 소유 또는 관리하는 ICC의 모든 자산은 동결되며,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에 신고돼야 한다.
또한 재무부는 ICC와 거래를 위해서는 180일 기한의 일반허가(general license)를 발급받도록 했다. 기관 운영 유지, 클라우드·소프트웨어 등 일부 정보기술(IT) 활동, ICC 연금, ICC 수감자 관련 활동 등이 대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2월 ICC 제재를 승인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으며, 루비오 장관은 올해 7월 ICC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하기 위한 조치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세달여 만에 전면적인 제재가 발표된 것이다.
루비오 장관은 “1년 넘도록 우리가 이 법원에 기대하는 선의의 제스처에 대해 분명히 밝혀왔다. 양측 관계를 존중하고, ICC가 입장을 바꾸거나 당사국들에 의해 제지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재량권을 행사해 이러한 제재를 유예해왔다”며 “그러나 ICC도, 당사국들도 우리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무대응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외교적 해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며 협상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ICC가 미국인들에 대해서는 기소나 재판할 권리를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트럼프 행정부의 주장이다. 2002년 설립된 ICC는 집단학살, 전쟁범죄, 반인도 범죄 등을 다루는 국제 사법기구다. 125개국이 회원국으로 참가하지만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이스라엘 등은 가입하지 않았다.
루비오 장관은 “ICC가 위협을 끝내든지, 우리가 ICC를 끝내든지 둘 중 하나”라고 경고했다.
특히 “ICC 회원국이면서 방위를 미군에 의존하는 다수 동맹국들이 재판소를 제어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는데,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들의 탈퇴를 압박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과 ICC의 갈등은 2020년 재판소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관련한 미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를 공식적으로 허용하면서 본격화됐다. 가자 전쟁 발발 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체포영장 발부 등을 두고도 각을 세웠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ICC 해체에 본격 착수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나 행정부 주요 인사 수사·기소 가능성에 고려한 사전 대비 작업일 수 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한편 이번 조치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ICC 재판관 출신인 남아프리카공화국 법률가 필레이를 평화상 수상자로 발표한 당일 이뤄져 뚜렷한 대조를 이뤘다.
필레이는 2003~2008년 ICC 상소심 재판관을 지냈다. 노벨위는 “평화와 국제법 증진을 위한 노력”을 수상 사유로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았으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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