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디넷코리아]
기술경영경제학회 산하 기후변화정책 특별위원회와 에너지산업기술정책 특별위원회가 10월 첫째 주부터 12월 둘째 주까지 11주에 걸쳐 ‘기후·에너지 전환의 실행 조건’을 주제로 지디넷코리아에 릴레이 기고를 연재한다.
정부의 한국형 녹색대전환(K-GX) 전략과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발표되는 시점에, 국가전략이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기 위한 조건을 전문가 시각으로 연속 진단한다. 학계·연구기관·산업계·시민사회 필진 11명이 전력수급계획 정합성, 탄소국경규제, 감축 기술 검증, 해상풍력 공급망, 계통 안정성, 수요관리, 데이터 인프라, 시장 설계, 산업단지 탄소중립을 차례로 다룬다.
총론(1회)과 종합(11회)이 시리즈의 문제의식을 열고 닫으며, 각 회차는 실증 데이터에 기반한 실행 가능한 제도를 제안한다. 계획과 현장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논의에 다양한 계층의 독자의 관심을 기대한다.(편집자 주)
지난 8월 26일 아침, 네팔 히말라야 빙하가 무너졌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맑은 날, 얼음과 암석이 뒤섞인 토석류가 계곡을 덮쳤다. 9월 중순까지 집계된 사망자만 1300명을 넘었고, 한국인 근로자들이 일하던 수력발전소 건설 현장까지 휩쓸렸다. 두 달 앞선 6월, 유럽은 사상 최악 폭염을 겪었다. 독일은 관측 이래 처음 41도를 넘겼고, 트램 선로가 녹아 도시 교통이 멈췄으며, 세계보건기구는 일주일 새 1300명 이상이 더위로 숨졌다고 밝혔다. 재난은 최빈국과 최선진국을 가리지 않았고, 기록은 갈수록 짧은 주기로 경신되고 있다.
이러한 이상 기후는 단순한 자연의 변덕으로 그리고 국지적 이슈로 치부할 수 없다. 기후이슈가 환경문제를 넘어 국가 기간 인프라와 거시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빙하 붕괴는 발전소와 교량을, 폭염은 전력망과 철도를 멈춰 세우며, 그 충격은 공급망을 타고 국경을 넘는다. 지속가능한 개발이 ‘성장이냐 환경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성장 조건 그 자체인 이유가 여기 있다. 기후 리스크에 대비하지 않은 성장은 재난 한 번에 무너지고, 전환 비용을 치르지 않은 산업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같은 통상 규제 앞에서 시장을 잃게 된다.
더욱이 최근에는 AI가 변수를 더하고 있다. AI 시대 병목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물과 전기다. 대규모 데이터센터 한 곳이 소도시 하나의 전력을 쓰고 냉각에 막대한 물을 소비한다. 반도체와 AI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키우겠다는 우리나라가 안정적이고 값싼 청정 전력과 용수를 확보하지 못하면 그 전략은 설계도에 머물고 말 것이다. 기후·에너지는 이제 AI 경쟁력의 전제조건이며, 데이터센터를 어디에 어떻게 세울지가 곧 국토·전력 정책의 문제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기술은 상당 부분 준비돼 있다. 해상풍력과 태양광, 에너지저장장치는 이미 보급 단계에 들어섰고, 그리드포밍 인버터도 계통 진입을 앞두고 있다. 정작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제도다. 규제는 혁신의 걸림돌이 될 수도, 투자를 이끄는 신호가 될 수도 있다. 현명한 규제 체계란 기술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시장에서 제값을 받도록 규칙을 정비하는 것이 돼야 한다.

정부가 예고한 한국형 녹색대전환(K-GX) 전략과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의 성패를 가르는 것도 기술 목록이 아니라, 그 목표를 현장에서 작동시키는 정책 설계와 규제 체계다. 신기술을 배제하는 낡은 규제, 시장 신호를 왜곡하는 보상 체계, 부처와 지역 사이에 분절된 거버넌스를 손질하지 않으면 100GW 재생에너지 목표는 숫자로만 남게 될 것이다.
제도 병목은 전환의 전 과정에 걸쳐 있다. 출발점은 계획이다. 전력수급계획은 하나의 수치를 확정해 놓고 그 수치를 맞추는 방식으로 운용돼 왔지만, 실제 수요와 공급은 매번 그 숫자를 빗나갔다. 불확실성을 반영하지 못한 계획은 현장에 잘못된 신호를 보낸다. 규제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탄소국경조정제도는 이미 수출 제조업에 실제 비용을 청구하고 있으나, 업종별 대응격차를 메우는 지원제도에는 여전히 큰 공백이 존재한다. 감축 실적을 검증할 방법론도 표준화되지 않았다. 공급 측면에서는 설비 보급 목표가 제작 야드의 리드타임과 계통 연계 기준을 앞지르고 있다.
발주가 불확실하면 제작 역량에 투자할 수 없고, 인버터 기반 전원을 계통에 어떻게 붙이고 무엇을 보상할지 규칙이 없으면 재생에너지는 생산돼도 연결되지 못한다.
수요 측면은 더 근본적이다. 우리 제도는 여전히 수요를 맞춰야 할 부하로만 볼 뿐, 피크를 깎고 부하를 옮기는 유연성 자원으로 평가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결국 규칙의 문제다. 발전량 데이터의 신뢰도를 확보하지 않으면 정산 기준이 서지 않는다.
RPS(신·재생에너지 공급의무화제도, Renewable Portfolio Standard) 폐지 이후 들어설 경매와 계약시장이 정책 목표와 같은 방향을 가리킬지도 아직 알 수 없다. 산업단지 탄소중립은 설계 기준에는 담겼지만, 운영 단계로 내려오기까지 갈 길이 멀다. 결국 이들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 속도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하나의 구조에서 비롯된다. 기술경영경제학회와 지디넷코리아는 열한 번에 걸친 릴레이 기고 시리즈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심층적으로 살핀다.
네팔 빙하와 유럽 열돔은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음을 보여준다. 전환 관건은 기술을 확보하는 일이 아니다. 확보한 기술이 현장에서 작동할 제도를 설계하는 일이다. 그 설계의 질이 향후 10년 대한민국 산업의 좌표를 결정한다. 계획과 현장 사이 간극을 메우는 것, 그것이 이 연재의 출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