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디넷코리아]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야간경관을 보러 가면 사람들은 먼저 빛을 본다. 수목을 비추는 경관조명, 길 위의 빛 조형물, 건축과 자연에 투사되는 영상이 낮과 다른 풍경을 만든다. 그런데 오래 기억되는 밤에는 소리도 함께 남는다.
멀리서 들리는 물소리가 걸음을 이끌고, 등 뒤에서 번지는 낮은 울림이 몸을 돌리게 한다. 어느 지점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리면 사람은 잠시 멈춘다. 음악이 사라진 뒤 다시 들려오는 바람과 발걸음도 그날의 장면이 된다.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시선을 돌리고, 걸음을 움직이며, 공간의 크기와 거리를 느끼게 한다. 빛이 밤의 모습을 만든다면 소리는 그 장면에 방향과 움직임, 호흡을 더한다. 사운드는 그래서 영상 뒤에 붙이는 배경음악이 아니라 사람의 시선과 동선, 머무는 시간을 함께 설계하는 연출 요소에 가깝다.
야간경관은 결국 무엇을 얼마나 밝힐 것인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보게 하고, 어디로 걷게 하며, 어떤 소리를 듣고 어떤 장면을 기억하게 할 것인가까지 함께 설계할 때 비로소 하나의 경험이 된다

빛이 시선을 붙잡는다면, 소리는 아직 보이지 않는 곳으로도 사람을 이끌 수 있다.
길의 입구에서 멀리 하나의 소리가 들리고, 걸음을 옮길수록 조금씩 가까워진다고 생각해보자. 한 장면을 지나면 그 소리는 등 뒤로 멀어지고, 다음 공간에서는 새로운 소리가 앞에서 시작된다. 사람은 소리의 방향과 거리를 따라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으로 이동한다.
공간음향은 바로 이런 관계를 다룬다. 단순히 소리를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시작되고, 얼마나 가까이 느껴지며,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언제 사라질지를 설계한다. 입체음향과 이머시브 사운드는 앞뒤와 좌우, 높이와 거리까지 활용해 소리의 위치와 움직임을 공간 안에서 몸으로 느끼게 할 수 있다.
사운드의 기능은 분명하다. 시선을 돌리고, 걸음을 재촉하거나 늦추며, 특정 지점에 머물게 한다. 서로 떨어진 장면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주는 역할도 한다. 영상이 장면을 보여준다면 공간음향은 그 장면 사이를 걷게 한다. 말하자면 사운드로 동선을 쓰는 것이다. 장소특정적 야간경관이라면 공간음향 역시 콘텐츠가 거의 완성된 뒤 덧붙이는 요소가 아니라, 장면과 관람 동선을 정하는 단계부터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야외 공간에 더 많은 음악과 효과음을 넣자는 뜻은 아니다. 좋은 사운드 연출은 무엇을 새로 들려줄지 정하기 전에, 지금 이 장소에서 무엇이 들리는지부터 살피는 데서 시작한다.
수변에는 물과 바람이 있고, 숲에는 나뭇잎과 풀벌레, 사람의 발걸음이 있다. 오래된 철길에는 한때 오가던 기적과 레일의 마찰음이 기억으로 남아 있고, 옛 포구에는 물결과 배, 사람들의 삶이 남긴 소리가 있다. 건축물과 지형이 만들어내는 울림도 장소마다 다르다.
이런 소리환경을 ‘사운드스케이프’라고 한다. 하지만 용어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들리는 소리, 그 장소의 기억 속에 남은 소리, 오늘 새롭게 만든 소리를 어떻게 관계 맺게 할 것인가다.
특히 역사문화공간에서는 실제 기록에 근거한 소리인지, 당시의 정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인지, 오늘의 창작자가 새로 만든 것인지도 구분돼야 한다. 장소의 시간을 다룰수록 사실과 해석, 창작의 경계를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어떤 수변에서는 별도의 음악보다 빛과 실제 물소리만으로 장면이 완성될 수 있다. 다른 장소에서는 빛 조형물에 가까워질수록 멀리 있던 소리가 다가오고, 프로젝션 영상이 끝난 뒤 인공적인 사운드가 사라지면서 실제 바람과 물소리가 다음 장면을 이어갈 수도 있다.
사운드는 공간을 채우는 장식이 아니다. 장소가 가진 시간과 기억, 사람의 움직임을 서로 이어주는 연출의 언어다.
야간경관 현장에서는 경관조명과 빛 조형물, 미디어콘텐츠와 음향이 서로 다른 기술과 공정으로 나뉜다. 하지만 그 공간을 걷는 사람에게는 따로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다. 결국 하나의 밤으로 경험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기술을 얼마나 많이 사용했느냐가 아니라 서로 언제 만나고, 언제 물러날지를 정하는 일이다.
빛이 먼저 시선을 열고 소리가 그곳으로 사람을 이끈다. 빛과 영상이 하나의 장면을 만들면 소리가 거리와 깊이를 더한다. 다음 공간으로 넘어갈 때는 빛과 소리가 함께 호흡을 낮추고 다시 새로운 장면을 준비한다.
나는 이것을 빛과 소리의 오케스트레이션이라고 본다. 서로 다른 기술을 나란히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경험이 되도록 조율하는 일이다. 장비와 기술이 의식되지 않고 장면만 남을 때 야간경관은 비로소 하나의 작품으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모든 순간을 빛과 소리로 채울 필요는 없다. 야외에는 이미 어둠이 있고 바람과 물, 사람과 자연의 소리가 있다. 어느 순간에는 빛이 낮아지고 소리도 멎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장소가 들린다.
빛에는 어둠이 필요하고 소리에는 침묵이 필요하다. 그 대비와 여백이 있어야 다음 장면의 빛과 소리가 다시 살아난다. 결국 연출은 무엇을 더할 것인가만이 아니라 무엇을 남겨둘 것인가를 판단하는 일이다.
야간경관은 빛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은 밤을 눈으로만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다. 빛이 장면을 만들고 소리가 거리와 방향, 움직임과 호흡을 더할 때 관람객에게 남는 것은 장비가 아니라 경험이다.
좋은 사운드 연출의 끝에는 스피커가 아니라 장소가 남아야 한다. 빛과 소리가 한 호흡으로 움직이고 기술이 뒤로 물러난 뒤에도 그날의 밤이 기억에 남는다면, 야간경관은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된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자원과 오래된 장소의 가치를 오늘의 감각으로 해석하고, 이를 콘텐츠와 디지털 기술, 공간과 도시 경험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글로벌 IT 미디어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의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현재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 ‘명경(名景)’을 운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