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최희정 기자 = “마지막 장면인 죽음을 무섭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받아들이며 추는 춤입니다. 제 무대보다는 베자르라는 안무가 자체에 초점을 맞춰주시길 바랍니다.”
러시아 명문 마린스키 발레단의 간판 김기민이 마침내 평생 꿈꿔온 ‘볼레로’ 무대를 한국에서 선보인다.
모리스 베자르(1927~2007)의 대표작 ‘볼레로’의 주역으로 나서는 그는 2일 화상 인터뷰에서 “평생의 꿈이었던 볼레로를 한국에서 하게 돼 너무 기쁘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클래식 발레 어법에 익숙한 그가 이번에는 현대 발레의 상징인 베자르 발레 로잔(BBL)과 호흡을 맞춘다. BBL은 20세기 중반 전통적인 발레 기법에 강렬한 표현력과 독창적 안무를 더해 현대 발레의 경계를 넓힌 프랑스 출신 안무가 베자르가 창립한 단체다. BBL이 서울 무대에 서는 건 2001년 이후 25년 만이다.
김기민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시절 베자르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고 했다.
그는 “‘볼레로’를 선생님이 추천해주셨다. 프로 무용수가 되어 이 춤을 꼭 춰야 한다면서 선생님과 같이 ‘볼레로’를 봤다”며 “조르주 돈이 추던 ‘볼레로’를 보면서 꿈을 키웠고, 언젠가 꼭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하지만 그 꿈은 쉽게 닿지 않았다.
김기민은 “7~8년 전 비엔나 국립발레단 초청으로 공연했을 때 당시 단장이었던 마누엘 르그리를 찾아가 ‘제가 프랑스에 연이 없는데 ‘볼레로’를 출 수 있느냐’고 물었다”며 “단장님이 내게 호의적이었음에도 ‘내 권한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그 춤을 추는 기회를 잡기 어려웠다. 쉽게 잡을 수 있는게 아니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접어뒀던 꿈은 3년 전 첫 제안을 받으며 현실이 됐다.
그는 “초연을 한국에서 하게 되어 너무 기쁘다”면서도 “제가 볼레로를 추는 것보다 베자르에 초점을 맞춰주셨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한국 관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베자르 공연을 봤다는 것”이라며 “모리스 베자르는 20세기 이후 춤추는 사람들에게 큰 유산을 남긴 안무가”라고 말했다.
한국인 최초로 BBL의 ‘볼레로’ 주역을 맡았다는 수식어에 대해선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솔직히 최초라는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며 “제가 최초로 했다는 건 중요하지 않고, 제가 안 하고 다른 사람이 했다면 더 좋은 결과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과거 베자르 발레단에서 동양인 여성 무용수가 붉은 원형 테이블 위에 올라가 춤을 춘 선례도 있다.
김기민은 “누군가는 했을 춤”이라며 “이번 무대를 계기로 베자르 발레 로잔이 한국에 지속적으로 투어를 오고, 한국 무용수들과의 교류가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어 “한 번 찍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 계속 나아가는 것”이라며 “올해만 하는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이 작품을 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가장 전통적인 클래식 발레의 산실인 마린스키와 현대 발레의 정수인 베자르 로잔의 만남에 대해선 “충돌은 없었고 오히려 너무 좋았다”고 했다.
그는 “베자르가 기존의 클래식함을 벗어나려 변형을 꾀했지만, 그 본질에는 클래식 무용수에 대한 애정이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BBL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독보적인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김기민은 리허설 과정에서 단순히 팔을 드는 동작 하나에만 한 시간을 할애할 정도로 그 스타일을 찾아내는 데 집중했다.
“말로 전해온 ‘비밀의 열쇠’가 있는데, 이걸 못 찾으면 열지 못합니다. 그건 곧 ‘스타일’이죠.”
그가 해석하는 볼레로는 단순한 감정의 묘사나 캐릭터 연기가 아니다. 무대 아래 군무진들이 밀어주는 힘을 상상하며 온 기운을 하나로 모으는 춤이다. 마지막 장면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환희 속에 받아들이는 감동으로 치환한다.
한국 발레계를 향한 뼈아픈 지적도 내놨다.
그는 “입시 발레가 너무 발전하다 보니 잘 속이는 게 많다. 기본적인 것을 익히기보다 무언가 있어 보이게 포장하는데 아주 큰 속임수”라면서 “콩쿠르 등에서 1분 혹은 10분 동안은 화려한 기술을 뽐내지만, 정작 전막 공연에 투입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백지상태’가 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콩쿠르를 보면 ‘왜 한국인들만 다 똑같을까’하고 생각한다. 기술과 나쁜 습관, 음악성마저 다 똑같다”며 “우리나라 학생들만 하는 것들이 있다. 이게 변화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다만 그는 한국 발레 교육의 수준과 기술적 정확성은 세계적 수준에 도달해 있다고 평가했다.
김기민은 “신체적 조건보다 아카데믹한 정확성이 해외에서 더 가치 있게 평가받는다”며 무의미한 회의감을 버리고 자부심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완벽한 기량을 끌어내는게 일”이라며 “항상 200% 이상을 준비한다”며 웃었다.
BBL은 오는 23~26일 서울 역삼동 GS아트센터 무대에 김기민과 함께 오른다. 김기민은 23일과 25일 ‘볼레로’ 공연에서 두 차례 관객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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