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텨야 합니다”…사비나미술관 이명옥 관장의 30년 사명감[문화人터뷰]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버텨야 합니다.”

사비나미술관 이명옥 관장, 30년을 버틴다는 것

“아이디어나 의지는 누구나 가질 수 있어요. 그런데 그걸 일관되게 계속하느냐가 정말 중요하죠. 버텨야 합니다.”

사비나미술관 개관 30주년을 맞은 이명옥 관장이 젊은 기획자와 화랑 운영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로 ‘지속성’을 꼽았다.

5일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서 만난 이 관장은 “미술관 운영은 결국 시간을 책임지는 일”이라며 “전시를 여닫는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이력과 삶의 시간을 함께 떠안는 선택”이라고 말했다.

1996년 ‘사비나 갤러리’로 출발해 미술관으로 성장한 뒤 지금까지 공간을 유지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가 미술관을 닫아버리면, 그동안 여기서 전시한 작가들의 경력도 함께 사라지는 거예요. 그걸 제가 감당할 수 없었어요.”

이 관장은 미술관을 작가의 ‘이력’이자 ‘시간을 증명하는 장치’로 인식한다. 그는 미술관을 하나의 ‘학교’에 비유했다.

“갤러리 현대나 국제갤러리처럼 이름이 남아 있으면 작가의 이력도 설명이 되잖아요. 그런데 전시장이 사라져버리면, 이 사람이 무엇을 해온 작가인지 알 수가 없어요.”

실제로 그는 한 작가의 프로필에서 이미 사라진 전시장 이름들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공간의 지속이 곧 작가의 역사”라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사비나미술관이 전시를 ‘열었다–닫았다’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이력과 시간을 함께 떠안는 과정으로 접근해온 이유다.

“미술관은 결국 작가의 시간을 책임지는 일이거든요.”

‘사비나’라는 이름, 책임의 선언

‘사비나(Sabina)’라는 이름을 내걸고 미술계에 뛰어든 이유이기도 하다. 1990년대 후반 당시 전시 공간들은 대개 지명이나 시대 감각에 맞춘 이름을 내세우던 시기였다. 이 관장은 자신의 세례명을 미술관 이름으로 내걸었다.

“오히려 미술관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그 이름에 책임을 지고 싶었어요.”

‘여왕’이라는 뜻도 담긴 사비나는 이후 사립미술관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다. 그에게 ‘이름을 건다’는 행위는 브랜딩이 아니라 약속에 가까웠다. 전시를 여는 주체를 넘어, 그 이름 아래 남겨질 시간까지 감당하겠다는 선언이었다.

◆ 1만 일의 시간, 미술이 묻고 사비나가 답하다
사비나미술관은 개관 30주년을 맞아 ‘사비나미술관 개관 30주년: 1만 일의 시간, 미술이 묻고 사비나가 답하다’를 6일부터 선보인다.

1만 일은 한 사람이 태어나 서른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이다. 이 기간 동안 사비나는 한국 미술계에서 테마 중심 기획과 융·복합 전시라는 개념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꾸준히 실천해온 공간이었다. 지금까지 열린 기획전만 300여 회에 달한다.

이번 아카이브 전시를 준비하며 이 관장 스스로도 놀랐다고 털어놨다.

“돌아보니까 나름 작은 역사가 있더라고요.”

1990년대 후반부터 사비나미술관은 셀피, 반려동물, 환경, 기후, 교과서 미술, 키스 등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한 전시를 잇달아 선보여왔다.

“왜 방학 때 전시를 안 하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교과서 미술전’, 기상청과 협업한 환경 전시, 대중문화와 미술을 접목한 실험들은 모두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질문’을 전시로 구현하려는 시도였다.

최근에는 한복·한옥·한글 등 K-콘텐츠와 전통문화를 현대미술과 접목한 해외 순회전도 이어가고 있다. 사비나미술관이 주관하는 ‘트래블링 코리안 아츠’ 프로그램은 일본 시로타 화랑, 폴란드 바르샤바 와지엔키 왕궁박물관, 캐나다 한국문화원 등에서 순회 전시되며 한국 전통미의 깊이와 현대성을 함께 소개해 왔다. 현재 필리핀과 말레이시아로의 확장도 추진 중이다.

사비나의 기획들은 당시에는 즉흥적 선택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것들은 하나의 시대 감각의 흐름으로 연결됐다.

“일부러 시대를 앞서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때그때 ‘이건 지금 필요한 질문 같다’고 느낀 걸 했을 뿐이에요.”

이 관장은 “사비나미술관의 가장 큰 특징은 개관전부터 지금까지 시대성을 반영한 테마 중심 기획과 융·복합 전시를 일관되게 실천해 왔다는 점”이라며 “동시대 사회·기술·문화의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포착해 전시와 교육, 체험 프로그램으로 확장하며 한국 사립미술관의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이번 30주년 프로그램의 메인 전시 ‘10,000일의 질문-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는 창작의 이면에 놓인 ‘불안’을 정면으로 다룬다. 강홍구, 권여현, 안창홍, 이흥덕, 유근택, 유현미, 정복수, 한진수, 함명수, 황선태, 황인기, 홍순명 등 사비나와 동행해온 작가 23명의 작품 43점이 출품됐다.

전시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는 중압감, 실패에 대한 불안, 고립감, 생계와 이상 사이의 간극 등 작가로 살아가는 현실을 조명한다. 예술가를 영웅이나 고통받는 천재의 신화로 바라보지 않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끝내 작업을 놓지 않는 ‘한 사람’으로 바라본다.

전시는 ▲두려움의 순간에 작가가 던진 질문 ▲그 질문이 조형 언어로 응답된 방식 ▲작업이 삶을 버티게 하는 힘으로 작동한 과정을 따라간다.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라는 질문은 창작자에 국한되지 않고,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다.

◆ 사비나, 이명옥… 초상화로 기록된 동행
특별 섹션 ‘10,000일의 동행, 초상화로 말하다’도 눈길을 끈다. 지난 30년간 사비나미술관을 이끌어온 이명옥 관장의 모습을 15인의 작가가 각기 다른 시선으로 포착한 17점의 초상화를 선보인다.

이 관장은 “내세우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망설였지만, 꺼내놓고 보니 부끄럽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며 “미술관과 작가의 관계를 협력의 차원을 넘어 ‘예술적 동지’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작가들은 이명옥 관장을 경영자이자, 사비나미술관이라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온 또 다른 창작자로 기억한다. 초상화에는 치열했던 1만 일의 시간에 대한 신뢰와 감사가 담겼다.

전시는 4월 19일까지 열린다.

◎공감언론 뉴시스 hyu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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